성공한 사람이 불행한 이유 – 자아의 목표와 영혼의 목적
세계적인 자기계발 구루, 토니 로빈스는 말합니다.
“충만함이 없는 성공은 최종적인 실패다.”
그가 수백억 원에서 수조 원에 이르는 부자들을 만나면서 깨달은 사실입니다. 누구나 부러워할 엄청난 성취를 이뤄냈음에도 정작 불행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았던 것이죠.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걸까요?
이들의 공통점은 단지 자아의 목표만을 좇았기 때문입니다. 지나친 자아 팽창이 발생한 것이죠. 이를 영어로는 에고 인플레이션이라 합니다.
목표 달성은 행복의 일부입니다. 목표’만’ 달성한다고 행복해질 순 없는 것이죠.
만약 당신이 충만한 성공을 원한다면, ‘자아’의 목표뿐만 아니라 ‘영혼’의 목적을 충족해야 합니다.
앞서 스틸밈 [목표] 카테고리에서 작성된 글은 모두 ‘자아’의 목표에 관한 글입니다.
[최고의 미래를 만드는 목표 설정법]
[최고의 미래를 만드는 목표 설정법 ②]
앞서 2개의 글을 통해, 어떻게 목표를 세워야 하는지 전달했습니다. ‘자아’의 목표는 명확한 수치, 명확한 기한, 명확한 달성 여부를 나타냅니다. 정략적으로 수치화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현실에 실현되는 힘이 강합니다.
반대로 ‘영혼’의 목적이라 함은 비전, 사명으로 표현됩니다. 비전이란 내가 창조하고자 하는 미래를 그리는 것입니다. 내가 실현하고 싶은 미래의 그림입니다. 사명은 내가 이 일을 해야만 하는 이유입니다. 내가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유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자아의 목표는 ‘나’에서 끝이 납니다. 자아(에고)가 원하는 것을 성취하고, 자아(에고)를 드높이는 것이 초점입니다.
영혼의 목적도 ‘나’에서 끝이 날 수 있습니다.
나는 왜 이 일을 하는가, 내가 삶을 사는 이유는 무엇인가, 내 삶에 의미 있는 것은 무엇인가 등
정성적이고, 감정적이며, 깊은 내면에서 울림을 주는 목적이 개인 차원에서 끝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충만한 성공을 원한다면, 영혼의 ‘목적’은 나를 넘어서서 외부와 연결돼야 합니다. 영혼의 ‘목적’이 단순히 ‘나’에서 그치면, 내적 충만감이 오래 지속되지 못합니다.
영혼의 목적이 ‘나’ → ‘나’ + ‘외부’로 나아가면, 질문이 바뀌게 됩니다.
전체 생태계에 ‘나’라는 존재의 역할은 무엇인가, ‘나’라는 존재는 이 사회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 것인가, 고객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본질적 가치는 무엇인가, 삶이 나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등
즉 ‘나’와 ‘외부’가 연결됨으로써, 확장된 존재로 거듭납니다.
사회 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는 말합니다.
“행복은 내면에서’만’ 오는 게 아니다.”
“행복은 관계에서 온다.”
“행복을 만드는 관계는 크게 3가지다.”
① ‘타인’과의 관계
② ‘일’과의 관계
③ ‘나보다 더 큰 무언가’와의 관계
이 3가지 관계가 당신의 행복을 결정합니다. 즉, 당신은 연결되어야 합니다.
외부와의 연결은 피부 경계선 내의 ‘나’라는 개체성을 넘어섬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지점에서 좌절합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진화적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보통 생존과 번식을 최우선 한 게 됩니다. 먹고사는 문제, 연애와 섹스에 큰 관심을 둡니다.
또 사회적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어떻게 사회에 잘 적응하고 타인과 관계 맺을지 끊임없이 고민합니다. 동시에 경쟁을 통해 더 많은 돈, 더 나은 직업, 더 높은 지위를 향해 나아갑니다.
보통 진화적·사회적 측면의 결핍은 ‘자아’의 목표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리고 몇몇 사람들은 ‘자아’의 목표를 달성하고 결핍을 해소합니다.
문제는 ‘자아’의 목표를 달성했는데, 오히려 불행해지는 경우입니다. 심지어 삶을 포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영혼’의 목적이 결핍되었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입니다.
반대로 뚜렷한 ‘영혼’의 목적은 죽어가는 사람도 삶의 의지를 불태우게 만듭니다. 고차원적인 영역에서 삶의 의지가 공급되기 때문입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저자 빅터 프랭클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갇힙니다.
수용소 안에서 살아남을 확률은 1/28도 안 됐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수용소 동료들의 관심사는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였습니다. 오직 생존하느냐에 초점을 맞춘 것이죠.
그런데 빅터 프랭클의 관심사는 달랐습니다. 그의 관심사는 ‘내가 원치 않은 이 현실, 사람들이 끝도 없이 죽어나가는 이 모든 시련이 의미 있는 것일까?’였습니다.
수용소의 동료들은 ‘결과적으로 살아남지 못하면, 이 모든 과정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반면에, 빅터 프랭클은 ‘내가 원치 않은 이 비극적인 시련 그 자체가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아닐까’라고 바라본 것입니다.
만약 이 비극적인 시련 속에서도 ‘삶’ 혹은 ‘신’이 던지는 메시지를 깨달을 수 있다면, 이 과정은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 충분히 살아갈 가치가 있는 삶이다.
오히려 생존해야만 의미 있는 삶이라면, 전혀 살아갈 가치가 없는 삶이다.
빅터 프랭클이 말하고자 하는 본질은 ‘아무리 절망스러운 상황에서도, 인간은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즉 수용소에서 살아남아야만 의미 있는 삶이라고 여기는 것은 ‘자아’에 국한된 관점입니다. (대다수 수용소 동료들의 입장)
반대로 어떤 시련 속에서도 ‘삶이 나에게 던지는 메시지가 무엇인가’라는 의문은 고차원적인 삶의 의미를 발견하도록 이끕니다. ‘나’라는 자아에서 국한되지 않고, ‘자아’가 시련을 주는 삶으로 확장되면서 심층적인 삶의 의미를 깨닫는 것입니다. (빅터 프랭클의 입장)
빅터 프랭클에게 편지를 쓴 한 젊은이는 죽음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젊은이는 과거에 영화를 한 편 봤는데, 죽음을 앞둔 사람이 용감하고 품위 있게 죽음을 마주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는 죽음을 이토록 의연하게 맞는 것이 인간으로서 위대한 성취라 생각했습니다.
그러고는 편지에 이렇게 썼습니다. 이제 운명이 자기에게 그와 똑같은 기회를 주었다고.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상황에서조차, 인간은 영혼의 목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개인만 해당되지 않습니다. 기업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표적인 테크 기업 마이크로소프트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사티아 나델라는 빌게이츠와 스티브 발머에 뒤이어 마이크로소프트 CEO에 취임합니다. 그가 취임할 당시 마이크로소프트는 위기를 겪고 있었습니다.
사티아 나델라는 취임 당시, 직원에게 던진 화두는 다음과 같습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무엇을 위한 기업인가?
마이크로소프트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
마이크로소프트의 영혼은 무엇인가?
그는 말합니다.
스티브 잡스는 회사의 영혼이 무엇인지 잘 알았다. “디자인은 창작물의 밑바탕을 이루는 영혼으로서 제품이나 서비스의 외관에 드러난다.”
나는 잡스의 말에 동의한다. 애플은 내면의 목소리를 소비자용 제품 설계와 연관 짓는 한, 영혼에 충실한 기업으로 남을 것이다. 그러나 마이크로소프트는 다르다.
마이크로소프트는 모든 사람과 조직이 강력한 기술에 접근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기술을 대중화하는 회사로서 영혼을 찾아야 한다.
『히트 리프레시』, 사티아 나델라, 흐름출판
사티아 나델라는 말합니다. “마이크로소프트가 존재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우리 제품으로 더 많은 힘을 얻게 하는 데 있다.”
즉 마이크로소프트의 본질은 애플처럼 영혼을 담은 제품과 서비스를 만드는 게 아닙니다. 즉, 사용자로 하여금 제품과 서비스를 사용할 때, 정서적인 터치를 경험토록 하는 게 아닙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본질은 고객의 생산성을 극대화하는 것입니다. 기술을 대중화시켜 진입 장벽을 낮춤과 동시에, 단위 시간당 고도의 생산성을 이끌어내는 것입니다.
이처럼 마이크로소프트만의 고유한 영혼을 찾게 되면서, 명백한 2가지 변화가 생깁니다.
첫째, 클라우드 퍼스트라는 명확한 목표가 생깁니다.
둘째, 회사의 영혼을 극대화하기 위해 새로운 조직 문화가 형성됩니다. 관료적이고 사내정치가 만연한 문화가 회사의 영혼과 정서적으로 연결되고 직원 간 서로 협력하는 문화로 탈바꿈됩니다.
그 결과 엄청난 주가 상승과 함께, 마이크로소프트는 부활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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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영혼의 ‘목적’이 개인과 기업에 미치는 영향을 전달했습니다. 스틸밈의 핵심가치는 개인의 무한한 잠재력입니다. 그래서 당신이 ‘자아’의 목표와 ‘영혼’의 목적을 둘 다 충족한 삶을 실현하길 바랍니다.
만약 ‘자아’의 목표를 등한시하고, ‘영혼’의 목적만을 중요하게 여긴다면 어떻게 될까요?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지 못한 삶이 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현실에 실현되는 힘이 약합니다.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뜬구름 잡는 이상론에 빠집니다. 삶의 목적, 사명, 비전은 화려하지만, 현실은 변화하지 않습니다.
힘없는 정의와 같습니다. 무능입니다.
무능에서 벗어나려면, 자아의 욕망을 긍정하고 확장시켜야 합니다. 크게 욕망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앞서 다룬 바 있습니다.
[성공에 대한 두려움, 크게 생각하는 마법 – 10배로 생각하라.]
반대로 ‘자아’의 목표만을 중요하게 여기고, ‘영혼’의 목적을 등한시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내가 원하는 것을 현실에 이루더라도, 불행합니다. 행복하지 않습니다. 공허하고, 무언가 단절된 느낌을 받습니다.
피상적인 인간관계, 경제적 자유를 위한 수단으로서의 일, 고차원적인 의미의 부재. 내가 정말 인생을 잘 살고 있는 것인지 회의감이 듭니다.
영혼 없는 욕망 추구는 정의 없는 힘과 같습니다. 스스로에 대한 폭력으로 귀결됩니다.
스티브 잡스는 말합니다.
“일상 너머의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깨달음이라고 생각해요. 삶에는 직업, 가족, 자동차, 커리어 이외의 무언가가 숨어있어요. 물질적인 것을 초월한 무언가가요. 동전의 반대면처럼. 우리는 그것에 대해 별로 이야기하지 않지만, 어떠한 괴리를 발견할 때 그것을 경험합니다.”
삶은 ‘자아’의 목표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잡스는 애플에서 만드는 모든 제품에 영혼을 담아내려 했습니다. 일상 너머에 있는 그 무언가를 전달하고자 한 것이죠.
그 결과, 애플의 고객은 말로 표현하지 못하더라도 직관적으로 느끼게 됩니다. 팬덤 고객이 생기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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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자아’의 목표와 ‘영혼’의 목적 둘 다 충족하는 삶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충만함 있는 성공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다양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한쪽에서는 ‘자아’의 욕망에 충실하라고 말합니다. 반대쪽에서는 ‘영혼’의 울림을 따라야 한다고 말합니다.
궁극적인 삶의 형태는 양 측면이 모두 통합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한 측면으로 기울지 말고 중도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즉 당신은 환경에 반응하는 무기력한 존재가 아닙니다. 충만함 있는 성공을 창조하는 존재로 거듭나야 합니다.
때론 가족도 사회도 명확한 방향을 제시해 주지 못합니다. 어떤 사상이나 이론도 개인의 삶을 담아낼 수 없습니다. 이는 결국 창조의 여정입니다. 열쇠는 당신이 쥐고 있습니다.
스틸밈은 극한의 변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을 향해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글에서 전달하는 내용들이 비현실적이라고 느낀다면, 지극히 정상입니다.
스틸밈은 당신이 최상의 삶을 실현하길 바랍니다. 극소수의 사람’만’이 삶에서 창조하는 변화의 원리를 이해하길 바랍니다. 따라서 비현실적이고 비상식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으며 이는 99% 사람들을 배제한 메시지입니다. 극한의 변화를 추구하는 단 1% 사람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의 없는 힘은 폭력이고,
힘없는 정의는 무능이다.
최배달
영혼 없는 욕망은 폭력이고,
욕망 없는 영혼은 무능이다.
스틸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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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죽음의 수용소에서』, 빅터 프랭클, 청아출판사
『디즈니처럼 상상하고 잡스처럼 실현하라』, 로버트 딜츠, 학지사
『히트 리프레시』, 사티아 나델라, 흐름출판
『승려와 수수께끼』, 랜디 코미사, 이콘
『스티브 잡스: 더 로스트 인터뷰』, 다큐멘터리
『#22 스티브 잡스: 가장 뛰어난 사람들에 대하여』, 스테이지5, 유튜브
『행복의 가설』, 조너선 하이트, 물푸레
『두 번째 산』, 데이비드 브룩스, 부키